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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에 동북 지역 최고의 무장으로 센다이의 초대번주(藩主)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고의 조력자였던  "다테마사무네(伊達政宗)"의  유소년기, 청/장년기, 노년기에 각각 있었던 주요한 사건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 다테마사무네의 유소년기
2. 다테마사무네의 청/장년기
3. 다테마사무네의 노년기

 

1. 다테마사무네의 유소년기


◆다테 마사무네의 탄생과 외모

센고쿠 시대가의 종반부를 달리고 있던 1567년 데와국(현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난 마사무내는 다테가문의 16대 당주였던 아버지와 데와국 다이묘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귀족 집안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시절에 천연두에 걸려서 생사를 넘나들다가 다행히 목숨은 건지게 되었지만  눈 근처의 발진으로 오른쪽이 실명되며 얼굴 모습이 흉측하게 변하자 자신의 눈을 뽑아내며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생일대의 스승과의 만남

 콤플랙스에 투성이에 소심함 소년시대의 마사무네를 바꾼 것은 바로 아버지가 소개해준 명승 "코사이 소이츠(虎哉宗乙)였습니다. 코사이 소이츠는 문과계열의 스승으로 불교/한학/문학 뿐만이 아니라 사무라이로써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도 마사무네에 영향을 주는데  어린 시절부터 이런 다양한 학문을 쌓아온 마사무네는 한시, 와카(일본 고전 가요) 등의 문학의 교양이 깊었고 그 실력은 교토의 악사들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실력이었다고 합니다.

 

2. 다테마사무네의 청/장년기

 

◆메고히메와 혼인(13세)

1577년 성인식을 맞이한 뒤에 다테 마사 무네는 13살에 다무라 미하루의 성주 였던 타무라 키요아키의 딸이었던 12살 메고히메와 결혼을 합니다. 당시 메고 히메의 모친은 '다테(伊達) 가문'과 끊임없이 군사적 충돌을 해온 '소마(相馬) 가문 14대 당주의 ' 딸로 소마 가문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결혼 후 메고 히메는 현 정권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사무네의 인질로서 여러 지역을 전전하는 생애를 보내게 되어 함께 생활한 것보다는 떨어져 지낸 나날이 더 많았지만 마사무네와는 슬하에 4명의 아이들을 두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전장에 첫 출전(15세)  

1581年 마사무네가 15세때는 (현) 미야기현 내부 지역으로 첫 출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다테 가문과 소마 가문사이에 결렬한 공방이 벌어졌던 지역으로 마사무네의 첫 출전한 마루모리쵸(丸森町)에는 "다테마사무네가 첫 출전한 땅"이라는 안내문이 적혀있다고도 합니다. 마사무네가 첫 출전의 비슷한 시기(1년 후)에는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노부나가가 그의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된 시기 이기도 합니다.
 

◆다테 가문을 잇는 당주가 됨(18세) 

1585年에 아버지인 다테 테루무네의 은거와 함께 마사무네는 다테 가문의 17대 당주가 됩니다.
 

◆아버지인 테루무네가 사살 되는 사건(19세)

다테가문에 굴불했던 니혼마츠성의 성주 하타케야마 요시츠쿠가 미야모리성에 은거하고 있었던 테무루네를 방문해서 자신의 성으로 납치하려 했고 그 당시 이 소식을 들은 마사무네가 현장에 달려갔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결국 그 자리에서 그의 아버지는 하타케 야마가 쏜 총에 맞이 숨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마사무네는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을 시도 했고 동북지역의 다이묘들과 교전을 펼치며 오우(奥羽) 지역 절반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후쿠시마/야마나시/미야기를 포함한 3현을 지배하는 동북 지역의 최강자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친어머니에 의한 독살 사건(23세)

마사무네가 23세인 1590년에는 친어머니인 오히메로 부터 마사무네에 독살 미수 사건이 발생 했습니다.
요시히메가 원하부터 예뻐했던 마사무네의 동생인 코지로를 다테가의 후계자로 생각하여 그를 죽일 계획을 꾸몄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운 좋게 독살은 실패하고 마사무네는 사태 수습을 위해서 동생을 죽여 버린 것이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히데요시 산하로 편입(23세)

관동의 최고 세력이었단 호조가문괴 마사요시 가문은 아버지 시대부터 동맹 관계였었지만 히데요시가 호조를 침략한 오다하라 전투가 일어났고 이어서 마사요시는 히데요시에게 전투 참가 요청을 받았는데 이 당시 마사요시는 2가지 선택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1) 호조와 협력해서 히데요시의 원정군과 전투
(2) 우선은 히데요시와 종산관계를 맺어 그의 산하에서 돌파구를 찾아봄

그는 결국 (2)를 선택하긴 했지만 망설임을 보이며 자신의 산하로 늦게 편입한 마사무네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처치하려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로 무사히 히데요시 진영으로 가담하고 사태는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침략에 출전(25세)

 히데요시는 명나라의 정복을 목표로 그 중간 지점에 있던 조선 침략을 감행하였고 마사무네도 수천 명의 군사를 데리고 군사를 1593년에 조선 반도에 상륙했지만 히데요시 군이 조선의병과 질병으로 고전하고 있었던 것을 목격했고 그의 군대 역시 조선 반도에서 큰 타격을 입기도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33세)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나자 도쿠가와 히데야스와 이시다를 포함한 도요토미 파벌의 대립이 심해지고 결국 1600년에는 두 파벌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는데 마사무네는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서있기는 했지만 전투를 참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시다편에 섰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손발을 묶어 놓기 위해서 시라이시성을 공격했기 때문이었고 결국이 성의 함락에는 성공을 하게 되어 자신의 심복인 가타구라 시게나가(片倉景綱)에게 이 성을 지배 하도록 합니다.


◆센다이성을 구축하고 번주가 됨(34세)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이듬해인 1601년에 센다이 성(仙台城)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에 완성하고 1603년에는 센다이성으로 이주하고 그가 있는 센다이가 '번(藩)'으로 승격하며 초대의 번주(藩主)가 됩니다.

 

3. 다테마사무네의 노년기

 

◆가신을 유럽에 파견(46세)

1613년 마사무네는 가신이었던 하세쿠라 츠네나가를 필두로 한 '케이쵸켄오시세츠'라고 하는 스페인 파견단을 결성하여 로마 교황에 파견합니다.
이때 마사무네는 영토 내에 기독교 확산을 인정하는 대신에 무역 루트를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불운하게도 당시 막부로부터 기독교 금지령이 발표되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최후의 전투 오사카의 진(47세)

센고쿠 시대가 끝나길 무렵이지만 아직도 의연하게 살며 도쿠가와 가문이 반기를 드는  도요토미 가문과 가신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두 차례 오사카 성의 침공을 감행하고 결국 도요토미 가문과 측근들을 전멸시키는데 이때 마사무네가 생애 마지막 출전을 하여 도쿠가와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고 그의 아들 히데무네에게도 막대한 보상이 수여되기도 합니다.


◆에도성(江戸城)에서 생을 마감(70세)

인생 중반부 이후부터는 센다이의 경영이 전력을 쏟아부었던 마사무네였지만 1634년부터는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1636년에 쇼군의 교대근무를 수행하러 에도성을 향한 후 병세가 더욱 악화되며 여러 명의들의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고하고 결국 에도에서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